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8세 (문단 편집) === 재위기간 === 루이 18세의 이후 치세는 민심의 수습에 중점을 두었다. 즉위와 함께 "나는 혁명 당시의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혁명 전의 아무것도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혁명 이전으로의 복귀를 예고하는 듯 했고 실제 망명한 귀족들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했지만 한편으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혁명 당시에 성립된 제도들의 존속을 약속하였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온건한 정책을 취했다. 실제로 복귀 직후인 1815년 거의 20년 만에 의회 총선을 치뤘으나, 혁명 이전의 전제군주제를 지지한 초왕당파가 전체 의석의 8분의 7, 그러니까 전체 400석 중 350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자 놀라 다음해에 바로 의회를 해산한 뒤 다시 총선을 치뤘고, 이번에는 입헌군주파가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공화파에게 부모와 형제를 잃고 학대당하여 원한이 컸던 조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마리 테레즈]]가 공화파 및 보나파르트파들을 제거한답시고 저지르는 [[백색테러]]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단 마리 테레즈는 서열상 남편과 숙부들을 능가하는 [[최고존엄]]에다 루이가 조카딸에게 약한 것, 그녀가 직접 지시한 증거가 없는 이상 왕도 함부로 야단칠 수 없었던 것. 만년이던 [[1820년]], 조카인 베리 공작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Ferdinand%2C_Duke_of_Berry?wprov=sfla1|샤를 페르디낭]][* [[샤를 10세]]의 차남이며 [[앙리 5세]]로 불리는 샹보르 백작 앙리의 아버지이다. [[루이 19세]]로 알려진 루이 앙투안은 [[샤를 10세]]의 장남이다.]이 자유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온건정책을 중단하고 절대왕정으로 회귀했고, 실제로 그해 치룬 총선에선 왕당파가 전체 200석 중 무려 187석을 차지했다. 이는 루이 18세의 애인과 남동생 아르투아 백작 샤를의 정치 간섭을 불러 소위 [[적과 흑]]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파일:external/cache.virtualtourist.com/4322000-Tomb_of_Louis_XVIII_Paris.jpg]] 1824년 9월 16일 자녀 없이 사망했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 지하묘실에 안장되었는데 프랑스를 통치한 국왕의 자격으로 매장된 사람은 루이 18세가 마지막이었다. 그의 뒤는 남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이 계승해 [[샤를 10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퇴위되면서 [[영국]]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그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해 생 드니 대성당에 묻히지 못하고 [[슬로베니아]] [[노바고리차]][*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에 묻혔다. [[루이필리프 1세]]는 이곳이 아니라 오를레앙 가문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안장되어온 드뢰 왕실 묘당에 따로 안장되었고[* 본래 사망지인 영국에 매장된 것을 1876년에 이장하였다. 현재도 오를레앙 왕가 구성원들은 이곳에 묻히고 있다.] [[나폴레옹 3세]]는 영국 땅에 안장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oseph_Boze_en_collaboration_avec_Robert_Lef%C3%A8vre%2C_Portrait_de_Marie-Jos%C3%A9phine-Louise_de_Savoie%2C_comtesse_de_Provence_%281786%29.jpg]] 아내 [[사보이아 왕조|사보이아]]의 [[마리아 주세피나]](마리 조제핀, 1753~1810). 신혼 때는 잘 해보려 노력했지만 계속되는 루이의 무시와 불화로 망명 후에는 평생 별거.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차녀로,[* 오빠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는 루이 18세의 여동생 [[마리 클로틸드]]와 결혼하고, 여동생 마리아 테레사는 루이 18세의 남동생 [[샤를 10세]]와 결혼하면서 연이은 겹사돈을 맺었다.] 개인 도서관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결혼 직후부터 덜 매력적이란 이유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여러 모로 밀렸고 남편에게 무시당하면서도 그의 음모에 잘 가담하는 등 많이 노력했다. 아이를 가지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루이의 초고도 [[비만]]으로 성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힘겨운 노력 끝에 [[마리아 주세피나|마리 조제핀]]은 두 차례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의학)|유산]]했고 이후로는 자식을 보기를 포기했다. 설상가상으로 1779년에 루이가 시녀와 바람이 나면서 부부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결국은 루이가 외도를 끝내고 용서를 구했지만 정이 다 떨어졌는지 공식 석상에서 말도 걸지 않을 정도로 남편을 싫어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에는 친정인 사르데냐 왕국으로 돌아가 별거했고, 말년에 들어서야 부부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별거 후에는 왕가 행사에 참여를 거부해 길바닥에서 드라마 급 난리를 펼친 적도 있었고 루이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810년에 사망해서 정식으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